파일 하나에 공정 기술 57개… SK가 빼낸 LG 배터리 기술 보니
美 국제무역委, SK 패소판결문 공개
LG출신 직원에 관련 정보 빼내고 소송 당하자 조직적 증거 인멸
SK측 "원만한 해결 위해 노력"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 출신 직원으로부터 양극재·음극재 관련 상세한 레시피 정보를 빼냈다." "'L사(LG화학)에서 취득한 자료를 다른 위치로 모두 이동시키고 이메일을 삭제하라'고 지시했다."
미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지난 20일(현지 시각)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전기차 배터리 기술 유출 관련 소송 판결문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지난달 14일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증거를 인멸했다'며 SK이노베이션에 대해 내린 조기 패소 결정 판결문이다. LG화학 측은 지금껏 "SK이노베이션이 우리 직원을 빼가면서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을 들여 개발한 배터리 공정 기술을 빼갔다"고 주장해왔고, SK 측은 "자연스러운 전직(轉職)이었을 뿐 기술을 빼간 건 없다"고 반박해왔다. 판결문에는 양측 공방 중 어느 쪽이 옳은지 진실이 담겨 있다.
◇SK, 배터리 레시피 통째로 빼내
국내 유력 대기업인 LG와 SK의 소송전은 지난해 4월 LG화학이 미국 ITC와 델라웨어주(州) 연방지법에 SK측을 영업비밀 침해 혐의로 제소하면서 시작됐다. 그후 양측은 미국과 한국에서 소송과 맞소송을 벌이며 치열한 다툼을 해왔다.
판결문 83쪽에는 2018년 LG에서 SK로 이직한 한 직원이 SK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이 증거 자료로 나와 있다. '이것이 유일하게 내가 갖고 온 정리된 자료'라는 제목의 이메일에는 LG화학이 보유하고 있는 '배터리 레시피' 파일이 첨부돼 있었다. 배터리 레시피는 양극재를 만들기 위해 니켈·코발트·망간 등을 조합하는 비율, 양극재·음극재를 얇게 코팅하는 방법, 이들을 일정 크기로 절단하는 방법 등 배터리 제조의 핵심 비결이 망라돼 있었다. 이 파일에 담긴 레시피만 57개에 달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 이메일에는 '자동차 모델별 정보' 파일도 들어 있었다. 전기차를 만들려면 각 모델에 따라 맞춤형으로 배터리를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이 정보도 기밀에 속한다. LG화학 관계자는 "이번 소송 과정에서 SK이노베이션이 3만4000개에 달하는 파일·메일을 삭제한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에 유출된 정보량은 가늠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증거 인멸용 리스트 만들었다가 들통
ITC는 SK 측이 저지른 증거인멸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했다. SK는 2017년 12월 LG가 대전지법에 자사 직원들의 국내 전직 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자 본격적으로 증거를 인멸하기 시작했다. 2018년에는 '팀룸에 존재하는 L사 관련 자료, 경쟁사 비교 자료, L사에서 취득한 자료를 다른 위치로 모두 이동시키고 이메일을 삭제하라'고 지시했다. 작년 4월 12일에는 LG화학 관련 삭제 대상 파일 980개를 정리한 리스트까지 만들었다. 이를 작성한 LG화학 출신 직원이 이 리스트를 삭제한 뒤 '휴지통'을 비우지 않은 채 자신의 컴퓨터에 담긴 파일 자료를 ITC에 증거로 제출하는 바람에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 ITC는 "이런 상황에서 적법한 법적 제재는 오직 조기 패소 판결 뿐"이라고 결론내렸다.
이에 대해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지난달 조기 패소 판결이 나왔을 때 밝힌 것처럼 원만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 이외에 달라진 것은 없다"고 말했다.
ITC의 최종 판결은 올해 10월 5일까지 나올 예정이다. 최종 판결에서는 관세법 337조(지식재산권 침해 관련) 위반 여부, SK의 미국 내 수입 금지 조치 등에 관한 결정이 나온다. 다만 양측이 합의할 경우에는 그 즉시 소송이 종료된다. 재계 관계자는 "우리 기업끼리 관행처럼 돼 있는 사람·기술 빼가기 등 전근대적 관행이 미국에서 철퇴를 맞은 것"이라며 "LG화학은 급할 게 없기 때문에 SK이노베이션이 납득할 만한 수준의 보상 방안을 내놓아야 양측의 합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22/2020032201579.html / 20-03-23 / 김강한 기자